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소지 마립간 (문단 편집) === 소지 마립간과 처녀 벽화 === 이는 《삼국사기》 소지 마립간 22년조(서기 500년)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이 해 9월 소지 마립간은 날이군(지금의 [[영주시]])에 행차했는데 날이군의 세력가인 파로라는 사람이 소지 마립간이 날이군에 행차한 것을 알고 딸 벽화에게 비단옷을 입히고 들것에다 태우고 비단으로 만든 보자기를 덮어 씌워 왕에게 바쳤다. 왕은 음식을 올리는 줄 알고 열어보니 어린 여자가 있어 괴이하게 여기면서 물리치고 궁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이 여인이 어지간히 미인이었는지 왕은 궁궐에 돌아와서도 벽화를 잊지 못해 밤잠을 이루지 못했고 벽화에 대한 생각이 뇌리에서 떠나지 않자 그리움을 못 이겨 수행원 몇 사람만을 데리고 일반 백성으로 위장해 몇 차례에 걸쳐 벽화를 만나러 갔다. 그렇게 밀회를 즐기던 어느 날 고타군(지금의 [[안동시]])을 지날 즈음 해가 기울어 어느 할머니 집에 묵게 되었다. 왕이 문득 백성들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해져서 할머니에게 나라 사람들이 왕을 어떤 임금으로 생각하는지를 묻자 할머니는 "모든 백성이 성군이라 하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 안하오!"라고 말했다. 왕이 이유를 묻자 할머니는 "왕이 날이의 여자에 반해 백성의 옷차림을 한 채 온다"며 "무릇 용이 물고기의 옷을 입으면 어부에게 붙잡히는 법"이라고 충고하였다. 왕은 할머니의 솔직한 말에 부끄럽게 여겼으나 벽화에 대한 사랑을 포기할 수는 없었고, 그래서 벽화를 경주 왕궁으로 불러들여 아들 하나를 얻었다고 한다. 그런데 《삼국사기》 <소지 마립간조>를 보면 벽화와의 이야기가 끝나고 곧바로 이 해 11월에 소지 마립간이 죽었다는 기사가 나온다. 9월에 만났는데 11월에 죽었다면 소지 마립간은 벽화와의 아들을 보지 못하고 죽은 게 된다. 이 당시의 소지 마립간은 나이가 대강 30대 후반으로 한창 활동할 나이였지만, 이 당시는 다들 평균 수명이 짧았고 소지 마립간은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에 즉위했기에 재위기가 이미 20년은 넘어가고 있었다. 때문에 고령으로 죽었을 확률은 매우 낮다. 벽화의 출신지는 일명 '''고구려 고지'''라는 별명으로 그 당대부터 자주 불렸던 영주-봉화 지역인데, 이 지역은 명목상으론 신라 영토였어도 고구려의 실질적 지배를 50년 이상 씩이나 받아왔던 지역이었기에 중앙 조정으로부터 그 충성심을 의심받고 있었다. 따라서 해당 지역 호족들은 신라 왕실에게 적극적으로 충성을 바치면서도 지위 상승의 기회를 노릴 수밖에 없었고, 그 맥락에서 딸을 바쳤던 것이다. 하지만 바로 아래 지역 안동 지역을 위시한 신라 중앙 왕실에선 충성심이 의심되는 지역 호족 딸을 별실에 데려와 후궁으로 삼는 소지 마립간의 행태에 크게 의심을 품었고, 이것이 소지 마립간이 승하하게 된 결정적인 원인으로 작용한 것 같다. 혹은 소지 마립간의 뒤를 이을 자식의 생산에 위기를 느낀 지증왕 세력이 움직였을 가능성도 높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지역은 훨씬 훗날 후백제가 신라를 압박할 때 아주 일찍부터 고려에게 귀순하여 적극적으로 후백제를 저지하였으며, 고려 시대 때도 신라부흥운동을 진압하는 자발적인 근왕군을 조직하게 된다.] 한편 영주 지방에 전해지는 설화에서는 엔딩이 다르다. 이 설화에 따르면 할머니와의 대화에서 스토리가 갈라진다. 《삼국사기》에서는 소지 마립간이 벽화를 데려오지만 이 설화에서는 소지 마립간이 결국 벽화와의 만남을 그만둔다. 벽화는 계속 왕을 기다렸지만 왕은 끝내 오지 않았고 벽화는 크게 상심해서 왕을 원망하다가 영주 중심부에 위치한 구성산성 건너편에 있는 서구대(西龜臺)위에 무신탑을 세우고 연모의 정을 삭이며 상처받은 마음을 달랬다고 전해지는데, 어쩌면 유복자를 낳은 벽화가 자애롭고 인내심도 강했던 지증왕에 의해 목숨만은 부지했을 개연성은 높다. 《[[고려사]]》와 《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이 탑은 고려 말엽까지 존재했던 모양으로 [[공민왕]] 때 지영주사로 부임한 정습인이라는 사람이 이 탑을 헐어서 관청을 수리하는 데 써버리자 [[신돈]]의 미움을 받아 하옥되었으나 다른 신하들의 만류로 겨우 죽음을 면했다고 한다. 그 후 그 탑을 다시 쌓도록 했다고 하는데 무신탑은 오늘날에는 전하지 않는다. [[조선시대]]에 이름이 재수없다는 이유로(無信--[[신용불량]]--) 헐어버렸다고...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